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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

홍인의세상사는이야기

무엇으로 사는가(2)-유아기

2003.06.23 19:02 1,580 0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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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에 있는 돌사진을 보면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나를 끔찍이나 사랑스러워 했던 것 같다. 맏형이 있으니 나를 여자아이였으면 했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속의 나를 보면 언제나 여자아이 옷을 입히고 바구니 같은 것을 들리곤 했다. 하지만 이 무렵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술에 취해야 입을 여는 형의 말에 의하면 4.19 학생의거 때 내 손을 잡고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며 쇠붙이 같은 것을 줏어서는 고물장수에게 팔거나 엿으로 바꾸어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어머니가 수공으로 장갑을 짜서 파는 공장을 시작한 게 아마 이 무렵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버지가 집에 없었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끼니는 그런대로 해결해 가면서 지낸 것 같다.  몇 해가 지난 후에는 아버지의 모직회사 취직으로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에는 몇 번 찿아간 기억이 난다. 특히 모직회사의 보일러실 책임자로 있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이 무렵에는 내게도 여동생들이 둘이나 생겼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동네 아이들과 놀았던 기억 밖에 없다.
동네아이들과 함께 했던 놀이는 그 종류가 무척이나 많았던 것 같다. 팽이찍기, 구슬따먹기, 재기차기, 자치기, 딱지치기, 연날리기, 얼음썰매타기, 동굴탐험, 도토리따기, 술래잡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놀이를 하면서 지낸 것 같다. 겨울에는 연날리거나 썰매탄다고 귓볼과 손발에 동상을 입어 몇 해나 오뎅만드는 공장에서 비지를 얻어 발을 담그곤 하던 기억이 난다.

집 주위의 푹신한 마당에서 놀던 그 시절의 기억이 그립다.
목욕은 명절을 앞두고 하던지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받기 전날 하던 것이 모두였다.
이발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에 두어번 가방에 이발기구를 담아 오는 이발사가 도착하면 집 앞 넓은 마당에 의자 하나 달랑 놓고는 차례를 기다려 이발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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