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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

홍인의세상사는이야기

무엇으로 사는가(23)-공중보건의 1년차

2004.05.10 11:50 1,635 3 25 0

본문

임관 후 첫 근무지는 거제도 장승포의 모 병원이었다.
인근에 조선소가 있는 관계로 병원을 찿는 환자들의 상태가 응급인 경우가 많았다.
이 지방의 풍토병인 장티푸스를 제외하고도 조선소 내 탑재부의 작업 환경이 지상 18m 이상이었기 때문에 엠블런스에 실려오는 환자들의 상태가 대퇴골골절, 두개골골절 등은 허다한 편이었다.
이 병원에서 근무한 6개월 동안 앉아서 존 것을 제외하고는 잠을 제대로 잔 기억이 나지않는다.

이제 그 얘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근무 첫 날 대학 선배인 부원장으로부터 우선 응급실에서 근무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각과의 과장님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아침에 내과 외래로 불려갔다. K 내과 과장님은 자기 옆에 따로이 진료용 책상을 두고 그 위에 harrison 책을 던지면서 환자를 보라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난대 없이 환자를 보라니...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앉자 간호원이 첫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고열환자다.
거제도의 풍토병인 장티푸스가 의심되는 환자였다. 옆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과장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내게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있다.

'저..과장님. 입원시켜야 할 것 같은데요.'

얼버무리는 내 말에 아주 간단한 답을 준다.

'알아서 하세요.'

헉! 이게 무슨 말인가. 의사면허증을 받은 후 아직 정식으로 외래환자도 보지 않는 나에게 입원환자를 알아서 하라고 하다니. 대책이 없다. 환자에게는 간단히 설명하고 간호원에게 병실을 알아보라고 말한 후 생각나는 검사 몇 가지와 엑스선 촬영을 진료기록부에 기록한 후 다음 환자를 불러라고 했다. 첫 날 오전 근무는 그렇게 외래에서 보내고 오후에는 줄곧 응급실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와 사투를 벌이면서 보냈다.

오후에 복도에서 내과 과장님을 만났다. 과장님이 내게 묻는다.

'아침에 입원시킨 환자 회진했나요? 상태는 어떻던가요?'

이건 또 뭐야. 나더러 회진을 했느냐고? 입원만 시키면 알아서들 하는게 아니었나?
의아해 하는 내게 머리가 징하는 말이 들린다.

'아니 환자를 입원시켰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정말 돌겠다. 뭘 알아야 회진을 하던지 치료를 하던지 하지.

'잘 모르면 책보고 찿아서 해요.'

그 말만 하고 자기는 퇴근한다면서 나가버린다. 미쳐. 정말
부랴부랴 병동으로 가서 환자진료기록부를 보니 아침에 내린 오더(order)만 그대로 있다.
입원실로 가니 환자는 아침에 맞은 수액 외는 특별한 처치도 없이 그냥 누워만 있었다.
상태를 불어보고 병동으로 다시와 챠트를 메꾸었다. 옳은지 틀린지도 모른 채 그저 생각나는 검사와 주사 처방을 지시하고 내려왔다. 그 날은 정말 머리에 쥐나는 날이었다.

1개월이 지난 후에는 그래도 제법 능숙하게 외래환자와 입원환자를 컨트롤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다른 과장님들이 다시 나를 더욱 바쁘게 만들고 만다. 소아과와 신경외과, 정형외과까지 합세한 것이다. 참,부인과도 있다.

1주일에 이틀은 오전에 내과와 소아과 외래 환자를 왔다갔다 하면서 봤다. 하루 오전 진료환자가 내과가 평균 60명 소아과가 80명 정도였으니 내 몸이 두조각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오후에는 주로 수술실에 있게 되었다. 신경외과와 정형외과 수술환자를 어시스트 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술실에서 나오면 다시 응급실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시달려야했다.

일요일에는 조선소 직원들 신체검사를 해야 했다.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신체검사하는 일도 예사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냈다.

응급환자 수송도 잦았다. 부산까지 엠불런스를 타고 오는 게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였고 서울까지 헬기로 환자를 수송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 뿐이다.

많은 사건을 겼었고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칼로 몸에 70여군데를 찔렸으면서도 살아 난 다방아가씨 강도사건과 사망 후 응급실로 실려온 천식환자를 살리기 위해 14시간동안 고생한 후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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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

님의 댓글

2004.05.10 10:17
  다른 분들의 회고담을 읽어보면 저만 편한 생활은 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실일까요 아닐까요?

님의 댓글

2004.05.10 11:19
  고생한만큼 시시한데서 인턴한 것보다 내공이 엄청 늘엇을거 가튼디..

 봉급도 마니 받았수?

님의 댓글

2004.05.10 11:50
  지금 동구보건소장인 최소장이랑 같이 근무를 했는데 월급은 없었습니다.
다만 신체검사비로 1인당 500원씩이 책정되어 있었는데 부원장이 나중에 안준다고 하는 바람에 싸웠습니다. 500원이라도 총금액이 1,000만원이나 되었는데 중간에 가로채는 바람에 마지막 날 최소장이랑 밤새 고급 술집만 여러군데 다니면서 원장 앞으로 계산서 끊어놓고 - 한 300만원 쯤 됐나 모르겠어요 - 다음 날 책상 위에 던져놓고 와 버렸어요.
그 때 익힌 테크닉이 개업한 후에 얼마나 큼지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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