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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

홍인의세상사는이야기

무엇으로 사는가(21)-사회초년생에게 찿아온 불행의 연속

2004.03.05 10:23 1,575 3 33 0

본문

나는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른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전자(前者)가 옳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후자(後者)가 옳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마도 인생이란 긴 여정을 걷다보면 마주쳐야하는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인간(人間)이란 존재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나의 사회생활은 첫 발걸음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의생(醫生)으로서의 사회생활이 채 시작도 되기 전에 나의 행로(行路)를 바꾸게 되는 여러가지 사건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결혼 후 처음 가진 아이는 7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개월경 출산 후에야 예상했던대로 아이의 상태가 무뇌증(無腦증-anencephaly)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태양이 눈부시는 이 세상의 반쪽도 바라보지 못하고 단 하루도 못되어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갈거면 차라리 엄마아빠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간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모른다.

아이에 대한 슬픈 기억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첫 아이를 실패한 나는 두번째 아이에게 쏟은 정이 강했다. 행여나 아이가 아플세라 조바심을 가지며 지켜보곤 했다. 하지만 이 아이도 생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출근 후 두어시간이 지났을 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손선생님. 애기가 병원에 왔는데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요."

공보의로 근무중이던 당시 야간당직을 하던 병원의 응급실 간호사였다.
부랴부랴 찿아간 응급실 한쪽 귀퉁이에 있는 침대 위에 흰 천이 덮여져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아래에는 사랑하는 나의 아이가 누워잇었던 것이다. 아직 체온이 따스하다.
옆에서는 아내가 울먹거리고 있고 내가 오는 것을 본 간호사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과장님 왔다가셨나요?"

울고 있는 가족들은 아랑곳 않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간호사가 측은한 눈빛을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래 진료실로 가서 담당과장을 만났다.
그는 의외로 응급실 상황에 대해 자세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아! 그 애기 손선생 아들이었나?"
"그런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 보는건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란 참으로 무정한 곳이다.

감기증상이 있던 아이가 우유를 먹고 잠든 사이에 구토를 하여 후두가 막힌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여러가지 여건을 잠재우기 위해 굳이 검시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사건은 나의 행로(行路)를 또 한번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담(後談)에 의하면 감기걸린 아이를 의사(醫士)인 애비가 방치해 두어서 그렇게 되었단다.
 
그 날밤 정말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 속에서 아이를 안고 산으로 가 삽을로 땅을 파 헤쳤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장대같이 내리는 비가 닦아 준다.
둘째 놈은 이렇게 지 애비 눈에 피눈물을 흐르게 하면서 형(兄)을 따라 가버렸다.

세사(世事)가 이 정도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나의 인생(人生)은 그러지 못했다.
아이가 나를 떠난 석 달 후, 나는 또다시 아픈 기억을 남겨야만 했다.
5남매 중 나와는 9살 터울이 있는 막내의 실종소식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자고 있는 나를 새벽부터 찿아와 친구들과 어디 간다고 용돈을 달라길래 호주머니에서 끄내 가라고 말하고는 계속 잠을 잤었는데 그 날 출근 후 세시간이 지나 밀양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동생이 유천에 빠져 실종이 되었는데 아직 시신을 찿지 못했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막내는 대학초년생이었다. 그림을 좋아해서 미대(美大)을 갔었고 나는 틈틈이 당직을 써서 번 돈으로 막내의 학비에 보태고 있었다. 막내는 내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는 늘 나와 같이 세상을 살고 싶다고 했었다.

밀양으로 단숨에 간 나는 강변에 가마니로 덮여있는 동생의 사체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옆에서 함께 실신한 어머니를 여동생들이 주무르고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내가 아끼는 세 사람을 보내야 하다니...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사체를 옮기기 위해 사체검안을 한 의사를 찿아갔다.
밀양읍에 개원하고 있는 모병원이었다. 병원 문을 들어서니 내가 졸업한 대학의 거울이 걸려있었다. 진료실 밖에 붙은 면허증을 보니 대학선배다.
마음이 울적했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은 들었다. 잠시후 진료실로 들어가 선배의사를 만나고 저도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이리저리해서 어디서 근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나를 알릴려고 소개한 것을 곧 후회하고 말았다.
그 선배는 두 말도 않고 접수실로 가서 계산하고 사체검안서를 받아가라고 했다.

괜히 무안해 그냥 나와서 계산을 하고 문을 나서다 왜 그러는지 궁금해 슬픈 마음을 잊고 다시 들어가 물었다. 왜 그러시냐고...
그런 나를 보며 그 선배는 이런 말을 던졌다.

"당신이 내 후배라고 소개를 하는 것은 돈을 깎아달라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아."

이런 일이 있은 후 내게는 모르는 사람과는 왠만하면 말을 하지 않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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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

님의 댓글

2004.03.03 22:48
  나쁜 넘입니다.
그자슥 아직도 살아있습니까?[05]

님의 댓글

2004.03.05 10:09
  한이 많이 맺혔었던 기억이신 것 같습니다. 이 글 어디서도 본 것 같은데... 그 선배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셨을 수도 있겠죠. 그 때는 뭔가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고.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01]

님의 댓글

2004.03.05 10:23
  꼭이 당사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적은 글은 아니고 제가 살아오는 과정에 이런 것들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보기 위한 거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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